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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주방을 이끄는 말랑말랑한 힘셰프 조은빛

방배동에서 ‘플라워 차일드’와 ‘와일드 플라워’ 두 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조은빛 셰프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만이 주방의 진정한 파이터라고 말한다.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듯 서서히 발휘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힘. 그를 보며 일찍이 함민복 시인이 예찬한 ‘말랑말랑 힘’의 위력을 새삼 떠올렸다.





Q. 요리사들은 보통 자신이 나고 자란 곳에서 자기 음식의 정체성을 찾기 마련이죠. 한국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당신의 배경이 요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궁금해요.
A. 초등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다양한 문화권의 이민자들과 어울려 지냈어요. 아르메니아인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그의 어머니가 만들어준 가정식을 맛보는 일이 아주 자연스러웠죠. 덕분에 요리에 있어서도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자란 것 같아요. 서로 다른 문화가 어우러질수록 새롭고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온다는 걸 일찌감치 터득했다고 할까요?

Q. 음식에 대한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나요?
A. 제 요리 중에는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한 메뉴가 많은데요. 특히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음식에 자주 반영하는 편이에요. 캠핑장에서 모닥불 피우며 먹던 바비큐의 기억을 담아 ‘캠프파이어’라는 이름의 스테이크를 내놓는 식으로요. 지금은 좀 더 은근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초창기에는 제 어렸을 적 사진을 붙인 일기장 위에 연필과 지우개 모양의 음식을 올려낸 적도 있어요.(웃음)

Q. 뮤트뮤즈 역시 스토리텔링을 중시하는 브랜드예요. 모든 제품의 이름과 문구에 브랜드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죠. 예를 들어 베스트 컬러로 꼽히는 ‘소르본 그린’의 경우, 프랑스 소르본 대학 앞 철학 서점에 꽂혀있던 오래된 책 표지의 기억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이름이에요.
A. 멋진 스토리텔링이네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예전에 만들었던 ‘숲’이라는 샐러드가 생각나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산책하던 숲의 공기를 표현한 메뉴였죠. 모양도 최대한 숲처럼 만들고요. 무언가를 만들 때 스토리텔링을 활용하는 건 아마 소비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그것이 나만의 특별한 경험을 넘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되길 바라는 거죠.

Q. 앞서 오픈한 ‘플라워 차일드’가 캘리포니아의 이민 생활에 바탕을 둔 ‘뉴아메리칸 퀴진’을 지향한다면 ‘와일드 플라워’는 서울의 현재를 반영한 ‘서울 퀴진’을 표방하고 있어요. ‘서울 퀴진’이라는 말이 흥미로운데, 좀 더 풀어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A. 서울에 온지 이제 겨우 4~5년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 문화가 크게 변했다는 걸 느껴요. 더 다양해진 동시에 다이내믹해졌다고 할까요? 그런 도시의 흐름을 요리에 반영하고 싶었어요. 서울의 다채로운 현재를 반영하는 동시에 서울에서 자랐다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메뉴를 선보이고 싶었죠. 한 예로 ‘트러플 메밀면’은 제가 어릴 때 서울에서 먹은 콩국수의 기억에서 출발한 메뉴예요. 구수한 메밀면에 잣과 초당순두부를 갈아 넣어 콩국수 특유의 싱거움과 텁텁함을 보완했죠.





Q. 요리사가 되기 전 정부기관에서 통역사로 일했다고 들었어요. 통역사에서 돌연 요리사라니, 이번 캠페인 슬로건 ‘Girls Go Everywhere’에 정말 딱 맞는 행보네요.(웃음)
A. 대학에서 국제학을 전공하고 통역사로 일하면서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만났어요. 덕분에 재미있긴 했지만 완전히 적성에 맞는 일은 아니었죠. 제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건 요리라는 걸 깨닫고 28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미국으로 돌아가 요리 공부를 시작했어요. 이미 10년차에 접어든 또래 친구들을 보며 좌절하기도 했지만, 통역사로 일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난 경험이 훗날 레스토랑을 운영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요즘 들어 자주 느끼는 건데 현재를 충실히 살다 보면 언젠가는 보상을 받는 것 같아요. 뭐든 열심히 배워 두면 다 쓸데가 있어요.

Q. ‘여자는 주방에서 버티기 쉽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가정에서의 부엌 일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는데도요.
A. 제가 실은 미국에서 와인도 같이 공부했는데요. 당시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들 중에 드물게 여성 소믈리에가 있었어요. 근데 뭐랄까, 정말 매력이 터지시는 거예요. 흔히 말하는 중성적인 매력이 아닌, 지극히 여성스러우면서도 ‘소프트 파워’가 있는 분이었어요. 그분을 보면서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죠.

Q.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 역시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죠. 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도 궁금해요.
A. 예전에는 여성 셰프, 남성 셰프로 나눠 말하는 게 싫었어요. 똑같은 직업인데 성별이 무슨 상관인가 싶었죠. 그러다 우연히 <요리의 여신들>이라는 프랑스 다큐멘터리 시사회를 진행하게 됐는데 그 작품을 통해 미처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됐어요. 애초에 남성 셰프들이 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걸요. 남자들의 경우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그들만의 인적 조직이 있는 반면 여자들은 자기 일에만 전념하는 경우가 많고, 가사나 육아 등의 이유로 모임을 조직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죠. 여자보다 남자가 유명한 셰프 밑에서 배울 기회가 더 높다 보니 미디어는 자연히 그들을 더 조명할 수밖에 없고요.





Q. 경우는 좀 다르지만 한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셀러브리티 셰프’의 개념이 국내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셰프, 특히 남성 셰프들이 전에 없는 주목을 받았어요.
A. 2년 전에 한 유명 요리 프로그램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는데 도중에 엎어졌어요. 제작진이 말하길 아직은 여성 셰프가 나올 때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전까지는 언론에 노출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 제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부터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야 저 같은 처지의 후배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겠다는 어떤 책임감을 느꼈죠. 그런 의미에서 뮤트뮤즈의 ‘Girls Go Everywhere’라는 슬로건이 저에게는 아주 와 닿았어요. 밖에서는 안보일지 몰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업계마다 멋진 여자들이 반드시 존재하거든요. 남자들처럼 이슈화가 되지 않았을 뿐이죠.

Q. 그런 의미에서 존경하는 여성 셰프가 있나요?
A. 프랑스계 미국인 셰프 도미닉 크렌Dominique Crenn이요.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잠시 일했었는데 그때만 해도 환경이 굉장히 열악했어요. 셰프님도 늘 피로에 지친 모습이었고요. 그런데 몇 년 후 미국에서 여성 최초로 미쉐린 3스타를 받은 셰프가 됐죠. 그 사이 저도 제 식당을 운영하면서 그분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됐고요. 현재 유방암 투병 중이신데 화학치료 때문에 머리를 다 깎은 상태인데도 여전히 일하고 계세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주방을 지키고 싶다면서요. 그게 진정한 파이터인 것 같아요. 강인한 척 허세 부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남 앞에 당당히 드러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Q.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
A.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식자재에 관한 법이 굉장히 까다로워요. 덕분에 각 지역의 특산물이 일정기준 이상의 품질을 유지하고 있고요. 자격이 주어진다면 한국에 그런 시스템을 도입하고 싶어요. 우리나라에도 가평 잣, 충주 사과 등 지역마다 좋은 식자재가 많은데 이상하게 관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이는 농부, 유통업자, 요리사의 영역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국제학을 공부하고 식자재를 다루는 저 같은 사람이 힘을 보태면 좋을 것 같아요.






Text / Bora Kang 강보라
Photographer / Siyoung Song 송시영